그러나 농노 해방, 수도원 해체, 무주택자 거주지 마련 등 공동소유 확대, 십일조 폐지 등을 주장한 농민들의 외침에 1,000년 동안 세상을 지배했던 권력층은
무자비한 진압으로 화답했다. 30만여 명의 농민군 중 10만여 명이 귀족들에게 학살되었다.
1524년 5월 15일, 독일농민전쟁 기간 중 최대 전투인 프랑켄하우젠 전투가 있던 이날 하루만도 농민군6,000명이 목숨을 잃었다. 포병도, 기병도, 군사훈련도, 지휘체계도 없이 농기구만을 든 그들이 정예군사를
당해내기란 애초에 불가능했다. 심지어 루터마저 농민군의 기세에 두려움을 느낀 나머지 농민들에게서 등을 돌려버렸다.
독일농민전쟁은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독일 농민의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고, 반대로 영주들의 권한은 더욱 강화되었다. 이로써 독일은 서유럽 나라들과 달리 르네상스의 길을 걷지 못했고, 새로운 시대로의
전진을 하지 못했다. 또한 이때의 좌절은 프랑스대혁명에 이은 서유럽 혁명의 시기에도 함께할 수 없게 만들었다. 이는 서유럽과 달리 연방군주에 의한 폐쇄적 절대주의를 오랫동안 유지하는,
그래서 경제적으로 낙후되는 이유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