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에듀 시대고시기획
아이콘1 이슈&시사상식 ㆍ
 
이슈&시사상식
한달 동안의 이슈가 된 시사, 생활상식, 화제의 인물 등을 한눈에 확인하세요

그림으로 읽는 전쟁사 <하얀 장미냐, 붉은 장미냐 장미전쟁(1455~1485)>

작성일 :
2020-05-22
산 하얀 장미냐, 붉은 장미냐
장미전쟁(1455~1485)
붉은 옷을 입은 사내가 하얀 장미 한 송이를 붉은 장미들 사이에 선 또 다른 남성에게 건넨다. 성 정체 성을 따지기 이전에 건네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이나 심지어 주변 인물들까지 꽃을 건네는 낭만적인 상황과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게 표정이 험악하다. 건네는 것이 꽃이 아니라면 결투 신청하는 줄로 알겠다.물론 목숨을 걸었다는 점에서는 결투라고 봐도 좋겠다. 다만, 둘 만의 결투가 아니라 잉글랜드 귀족 전체를 양분한 결투였다는 게 문제겠지만.

선택하라, 너의 장미를

프랑스에 비해 객관적 전력에서도 앞섰고 전쟁 전반기에 승기를 잡았음에도 결과적으로 100년전쟁에서 패배하자 잉글랜드 왕실의 권위는 바닥까지 추락했다. 여기에 헨리 6세를 앞세운 랭커스터가문의 실정은 가히 무정부상태라고 부를 수 있을 지경으로까지 내몰았다. 이렇듯 왕실과 정부가 무력해지자 전쟁에서 돌아온 병사들은 정부 대신 지방 귀족영주들 에 합류했고, 이 때문에 지방세력이 커지게 되었다. 이런 때에 지방귀족들 동맹의 수장 격이었던 요크가문이 자기방어를 위해 무기를 잡으면서 잉글랜드는 내란의 파도에 휩쓸리고 말았다. 이제 잉글랜드 귀족은 랭커스터가문을 따르는 쪽과 요크가문을 따르는 쪽으로 양분되었다. 중립은 있을 수 없었다. 햐얀장미의 요크인지 붉은 장미의 랭커스터인지 분명히선택하지 않으면 적으로 간주되어 척살되었으니까.

내란은 금방 끝날 것 같았다. 랭커스터가문이 스코틀랜드로 쫓겨 가고 요크가문에서 왕위를 이었을때만 하더라도 말이다. 그러나 요크를 중심으로 한 귀족동맹의 내분은 다시금 랭커스터를 끌어들였고, 이번에는 요크가문이 네덜란드로 도망쳐야 했다.

하얀 색도 붉은 색도 아닌 새로운 장미의 시대

물고 물리는 귀족들의 전쟁은 해를 거듭했다. 그러다 1471년 3월 폐위되어 네덜란드로 도망쳤던 에드워드 4세가 돌아와 평정하면서 종식되는 듯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내분이 문제였다. 1483년 에드워드의 동생 리처드 3세가 조카인 어린 에드워드 5세를 폐위하고 왕위에 오름으로써 많은 요크가문 사람들을 따돌렸다. 그러자 요크가문은 아이러니하게도 지난 30년가량 적이었던 랭커스터의 헨리 튜더에게 희망을 걸었다. 결과적으로 30년 동안 이어졌던 하얀 장미와 붉은 장미의 싸움은 프랑스와 요크파 망명자들에게 도움을 받은 헨리가 1485년 8월 22일 보즈워스평원의 전투에서 리처드를 죽이고 에드워드 4세의 딸 엘리자베스와 결혼함으로써 요크가문과 랭커스터가문의 왕위계승권 주장을 하나로 만들어 명실상부 내란을 종식시키고 헨리 7세로서 새로운 튜터왕조를 열면서 마침내 끝이 났다.

30여 년 동안 내란에 의해 반복되는 왕위찬탈로 반대세력들은 외국으로 도망가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죽음을 맞았다. 때문에 헨리 7세가 즉위한 후 귀족들의 수는 이전에 비해 절반밖에 되지 않았다. 귀족의 수가 적어진 것은 두 가지 결과로 이어졌다. 첫번째는 지방에 영주가 일부 사라지면서 지배력에 공백이 생겼다는 것이다. 이는 봉건제도의 붕괴였다. 두 번째는 귀족의 수적 열세로 왕권이 강화되었다는 것이다. 바로 헨리 8세와 엘리자베스 1세의 절대 왕권시대를 펼쳐나갈 수 있게 하는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