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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으로 읽는 전쟁사<십자군전쟁(1095~1456)>

작성일 :
2020-02-24
산 종교를 지키려다 중세를 끝장내다
십자군전쟁(1095~1456)
476년 서로마제국이 게르만족에 의해 멸망당한후에도 1,000년이 넘는 역사를 이어온 동로마제국의 콘스탄티노플은 기독교 문화의 중심지였다. 비록 위세는 전과 같지 않았지만 여전히 동서문명과 교역의 집결지로서
명성을 유지하고 있던 그곳에 1456년 이교도들이 들이닥쳤다. 1,000년 동안 3중으로 축성한 탓에 내통자가 성문을 열어서 함락된 경우를 제외하고는 기록상 23차례의 침공을 허락하지 않았던 난공불락의 요새의 데오도
시우스 성벽이 500kg의 돌 포탄을 1.5km 이상 날리는 괴력을 발휘하는, 8m가 넘는 길이의 ‘우르반 대포’에 무너진 것이다.

성문을 넘는 20세의 젊은 술탄 메메드 2세 뒤로 정예부대 예니체리들의 함성이 들리고, 승리자의 발아래에는 마지막까지 저항했던 동로마제국의 황제 콘스탄티누스의 시신이 처참하게 채인다. 1,000년을 넘게 유럽을 이끌었던 기독교 중심의 중세봉건사회가 종말을 고하는 순간이었다.

저마다 다른 욕심과 욕망의 원정

시간을 거슬러 1095년 11월, 프랑스 클레르몽에서 종교회의가 열렸다. 이교도들로부터 성지인 예루살렘을 되찾자는 것이 의제였다. 오스만제국이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기독교인들의 예루살렘 성지순례를 방해한다는 것이 이유였다.

성지를 사수해야 한다는 주장은 곧 대규모 다국적 군대의 결성으로 이어졌고, 가슴과 어깨에 십자가 표시를 한 채 구원과 회개를 위해 이슬람으로 향했다. 그러나 실제로 이들의 속내는 드러낸 것처럼 경건하지 않았다. 교황에게는 분열된 동서교회를 통합하여 교황권을 절대적인 존재로 만들겠다는 야심이, 영주와 기사들에게는 새로운 영지와 재물을 얻겠다 는 야욕이 있었다. 또한 십자군 원정단의 돈줄이자 교두보였던 베네치아와 제노바의 상인들에게는 동방 지역과의 무역을 통한 경제적 욕심이, 농민들에게는 농노의 신분에서 벗어나겠다는 욕망이 숨겨져 있었다. 속내가 그러하니 원정길에 도덕과 윤리가 있을 리 없었다. 식량이 떨어지면 바로바로 약탈을 했고, 피아를 구분하지 않고 학살하기에 이르렀다. 심지어 교황은 거듭된 참패로 기사와 병사들을 모으 기 힘들자 거짓 예언을 내세워 소년·소녀를 배 7척에 실어 전장으로 보내기까지 했다. 물론 이들은 목
적지에 다다르기도 전에 난파되어 죽었고, 일부는 알렉산드리아에서 노예로 팔렸다.

과거를 무너뜨리고 새 시대로

전쟁이 길어진 만큼 원정단의 세속적 욕망도 그만 큼 커져 갔다. 예루살렘보다는 경제적 가치가 있는 다른 지역을 공격했다. 기독교의 본산이었던 동로마 제국의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해 약탈하기도 했다. 동 로마제국의 재물을 탐낸 베네치아 상인들의 사주가 있었다고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십자군전쟁 자체가 그 목적을 잃었다는 방증이었다. 전쟁은 제7차 원정 후 기독교인들의 마지막 도시 아콘이 함락되면서 사실상 막을 내렸다. 그러나 서방세력의 마지막 보루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될 때까지 오스만제국의 공격은 끊어지지 않았다. 성지를 되찾자는 근본적 목적 으로 봤을 때 십자군전쟁은 실패였다. 그 결과 교황과 봉건 영주의 권위는 끝 간 데 없이 추락했다. 특 히 농노들이 전장에 끌려가 죽음으로써 노동자들을 잃어버린 영지는 황폐해졌다. 중세의 경제적 기반이 었던 봉건제도가 흔들리기 시작한 것이다. 한편 국 왕을 견제했던 영주의 몰락은 왕권이 강화되는 효과 로 이어졌고, 일거리를 찾아 농민들이 도시로 밀려 들면서 상공업 위주의 도시들이 발전했다. 중세를 굳건히 하기 위해 시작한 전쟁이 오히려 중세를 무너뜨리는 결정적 계기가 되어버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