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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운의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

작성일 :
2014-10-01
마리 앙투아네트와 궁전

비운의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

마리 앙투아네트와 궁전 마리 앙투아네트
(Josephe-Jeanne-Marie-Antoinette, 1755~ 1793) 프랑스왕 루이 16세의 왕비
“프랑스의마지막 왕비는혁명의물결 속에서살아야 했던그 시대의희생양이었다.”

프랑스 국왕 루이 16세의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그녀의 삶은 영화, 만화, 소설 등 다양한 장르에서 극적인 이야기 소재로 자주 등장한다. 사치, 낭비, 향락으로 프랑스 혁명을 재촉한 것으로 지목되는 반면에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 부당하게 폄하되고 결국 죽임을 당한 비운의 여인으로 동정 받기도 하는 마리 앙투아네트의 인생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상냥하고 아름다운 소녀

마리 앙투아네트는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프란츠 1세와 오스트리아 제국의 여제 마리아 테레지아의 사이에서 막내인 15번째 자녀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자유분방하게 성장한 그녀는 모국어인 독일어를 비롯하여, 프랑스어와 이탈리아어 등 외국어와 음악과 춤을 배웠다. 오스트리아의 예술적 풍토에서 자란 그녀는 음악과 미술을 좋아했다. 당시 오스트리아는 프로이센의 위협을 받고 있었기에, 그녀의 어머니인 마리아 테레지아는 전통적인 외교 관계를 전환하여 그동안 적대국이었던 프랑스와 동맹을 강화하려고 했고,그 일환으로 프랑스의 도팽 루이 오귀스트와 그녀를 정략 결혼시키려 하였다. 1770년, 그녀는 14살의 나이에 베르사유 궁전에서 루이와의 결혼식을 치루고 프랑스의 마담 라 도팽 마리 앙투아네트가 되었다.

음모의 중심에 선 프랑스 왕비

1774년, 루이 15세가 병으로 서거하자 남편이 루이 16세로 즉위했고 마리는 프랑스의 왕비가 되었다. 마리는 루이에게 선물로 받은 프티 트리아농을 전원적인 분위기로 개조하였으나 호화별장 개조로 소문이 났다. 1785년에는 부르봉 왕가의 치세 말기를 상징하는 스캔들인 목걸이 사건이 발생하며 그녀에 대한 민중의 불신은 한층 더 가중되었다. 사건의 진상이 밝혀졌음에도 파리 시민들은 여론을 잠재우기 위해 마리 앙투아네트가 죄 없는 사람에게 누명을 씌웠다고 생각했고, 이런 오해는 그녀를 향한 증오의 도화선이 되었다. 그녀는 자신이 마음에 드는 소수의 귀족들만을 총애했고 그로 인해 그 그룹에 끼지 못한 귀족들의 미움을 샀다. 더구나 혁명군들은 정치적 선동을 위해 고의적으로 그녀가‘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라 하라’는 말을 했다고 퍼뜨렸다. 결과적으로 여러 유언비어들은 파리 민중들의 증오를 가중시키며 마리를 죽음으로 내몰았다.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지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민족주의에 깊이 물든 혁명기의 민중에게 적국 출신의 오스트리아 여자였고 반역자였다. 그녀는 혁명 재판으로부터 사형 판결을 받고 1793년 10월 16일, 남편의 뒤를 따라 단두대에서 참수당했다. 합스부르크 왕가의 사람답게 품위를 중시했던 그녀는 반혁명의 혐의로 3일 간 받은 심문 내내 의연하고 담대한 모습을 보였으며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는 순간에도 품위를 잃지 않았다. 사형장에서 사형 집행인의 발을 실수로 밟았을 때에도“미안해요.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니었어요.”라며 마지막까지 에티켓을 지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