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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물로 보는 역사

작성일 :
2016-11-28

건축물로 보는 역사

“ 건축은 역사의 부분이고
과정이며 미래이다 “

조선의 신기술과 개혁 정신이 빚은 위대한 유산
무언가를 짓고자 하는 인간의 의지는 안락한 은신처를 찾는 자연스럽고도 근본적인 욕구에 따른다. 그렇기에 건축은 태초부터 현재까지 인간의 삶 속에 항상 존재해 왔다. 인간이 문명을 발달시켜 온 과정, 사회구조의 변화, 권력의 형성 과정 등 인간이 거쳐 온 많은 역사적 사실들이 수많은 건축물을 통해 드러난다. 당대 시(時)ㆍ공(空)간, 그리고 그 안에서 펼쳐졌던 사건들을 압축적으로 상징하는 건축물로 살아있는 역사를 마주할 수 있을 것이다.

화성

수원 화성(華城)
경기 수원시 / 1796년 / 조선 시대 정조 / 성곽

실사구시(實事求是)의 과학 정신 반영

정조가 태평스런 시대에 천문학적 비용을 들여 성곽을 쌓은 이유에 대해선 의견이 분분하다. 억울하게 돌아가신 아버지를 위해, 수도를 화성으로 이전하기 위해, 왕위를 세자에게 물려준 후 자신은 화성에서 살며 상왕으로 정치에 관여하려고 했다는 설까지 많은 의견들이 대립한다. 하지만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은 화성이 정조의 꿈을 펼칠 새로운 세상이었다는 것이다. 역사적 사례에 비춰볼 때, 이 정도의 인원과 공사비가 소요된 거대 작업은 조정 관료와 민심의 거대한 반발을 일으키기 쉽다. 하지만 화성 축조의 경우만큼은 예외였다. 정조는 화성 축조에 참여한 모든 사람들에게 인건비를 주고, 화성 건축으로 인해 이사를 가야 하는 백성들에게도 충분한 보상을 해주었을 정도로 백성들의 편에서 화성을 건설해 나갔다.

약 6km에 달하는 화성 성곽의 건설은 조선 역사상 서울 건 설 이후 가장 대규모 사업이었다. 총괄하여 ‘화성성역’이라 불 렀던 이 엄청난 사업은 조선 시대 정조 18년(1794)에 시작하 여 정조 20년 9월에 완공되었다. 여기에는 정조의 남다른 열 정과 신하들의 탁월한 지혜와 노력이 기울여졌으며, 수많은 백성들의 기술과 힘이 효과적으로 결집되는 등 당시 중흥을 맞았던 조선의 모든 역량이 총동원되었다. 화성은 군사적 방 어 기능과 상업적 기능을 함께 갖추고 있으며, 실용적인 구조 로 되어 있어 동양 성곽의 백미로 평가받는다.

정조의 효심이 반영된 건축물

정조는 개혁적이고 창조적인 군주이자 정치적 안정과 문예 진흥에 힘을 쏟은 왕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이러한 그의 많 은 업적보다도 그의 생애에 관심이 더 기울여져 조명되어 왔 던 것이 사실이다. 뒤주에 갇혀 비참한 죽음을 맞은 사도세자 의 아들로서, 어린 나이에 아버지의 죽음을 직접 목격한 불행 한 인물로서 말이다. 아버지의 죽음을 항상 슬프게 여기던 정 조는 자신이 즉위한 지 13년이 되던 1789년, 죄인으로 단죄된 아버지의 초라한 무덤을 원래 수원 읍치(邑治)가 있던 화산(花 山) 아래의 천하명당 자리로 옮겨 왕릉에 버금가는 격상된 계율을 갖추어 놓았다. 그리고는 다시 5년을 기다려 효도의 유교 윤리를 명분으로 내세우면서 행궁과 화성 건설에 착수했다.

화성에 담긴 포용 정신

동서양의 모든 문화를 수용하여 그것을 조선화하고자 한 정 조와 당대 학자들의 포용력이 보여준 결과가 바로 화성이었 다. 이러한 포용 정신은 화성 축성에 참여한 수많은 이들의 신분이 위로는 국왕에서부터 아래로는 승려와 천민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회 계층이 망라되어 있는 데서도 나타난다. 정조는 여러 정파의 인재를 광범위하게 동원하여 이들이 경쟁적으로 능력을 발휘하도록 격려했다. 그래서 화성 축성에 참여한 이들은 혼신의 힘을 다했으며, 그 결과 10년을 예상했던 공역이 3년이 채 안 돼 마무리되었다.

정조는 진정 백성들을 위해 자신의 많은 것을 바친 군주였 다. 그렇기에 조선 사회의 개혁, 그리고 이 개혁을 함께할 선 진적 인물과 도시가 절실히 필요했던 것이다. 정조의 시문집 인 <홍재전서>에 제일 많이 나오고 키워드처럼 삼는 게 있다. 바로 소통이다. 정조는 수원으로 행차를 하는 길에 항상 백성 들의 상언을 허용하여 대민 접촉과 민안을 해결하였다고 한 다. 이러한 소통을 바탕으로 다양한 사람을 끌어들이면서 위 기를 돌파했고, 조선의 황금기를 이끌 수 있었던 것이다. 다 음 <일성록>의 글을 보면 정조가 백성들을 생각하는 마음을 잘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온 산에 가득한 백성들과 들에 가득한 곡식을 보니 감회가 있도다. 연사(年事)가 다행히 평년보다 잘 된 것도 황천이 돌 보심이다. … 관광민인(觀光民人) 또한 담장처럼 둘러서니 억 만을 헤아리는구나. 노인과 아이들을 이끌고서 길을 가득 메 웠도다. 내 오늘 이곳에 임하여 이 백성들을 대하니 한 가지 생각에 가슴이 뛴다. 어찌하면 모든 이들의 마음을 얻을 수 있을 것인가. 오직 믿는 것은 경들이 돕고 보좌하는 정성뿐이다” - 『일성록』 78책, 정조 3년 8월 3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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