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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으로 읽는 전쟁사 <동서양 최초의 충돌 페르시아 전쟁(기원전 480)>

작성일 :
2019-12-26
산 동서양 최초의 충돌
페르시아 전쟁(기원전 480)
기원전 550년경 메디아, 신바빌로니아, 인도, 이집트를 차례로 정복하며 거대한 제국으로 성장한 페르시아에게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가 있었다. 아시아는 물론이고 아프리카에 소아시아까지 정복한 자신들의 패권을 인정하지 않았던 해상국가 그리스였다. 지중해로 세력을 확장하고자 했던 다리우스 1세는 결국 그리스 정복에 나섰다. 페르시아 전쟁의 시작이었다.
그러나 1차는 폭풍우로, 2차는 마라톤 전투에서의 패배로 실패하고, 기원전 480년 8월 그의 아들 크세르크세스 1세가 설욕을 위해 다시 대규모 원정에 나섰다. 이때 원정의 규모는 보병·기병이 78만명, 함선·수송선이 4,200여 척으로 그리스 연합군의 30배나 되었다.

적의 발목을 잡아라, 테르모필라이 전투

헬레스폰토스 해협을 건넌 페르시아는 파죽지세로 진격해 테르모필라이 계곡을 목전에 두었다. 그때 그리스 도시국가들은 연합군을 조직하고 총사령관은 스파르타 왕 레오디나스, 작전 지휘는 아테네의 참주 테미스토클레스에게 일임하는 등 대응체계를 갖췄다. 그리고 테르모필라이 계곡에서 페르시아군을 저지하는 동안 해군이 페르시아 해군을 격멸시켜 전세를 역전시킨다는 작전을 세웠다. 그렇게 해서 벌어진 전투가 바로 테르모필라이 전투였다. 레오디나스의 지휘 아래 300명의 스파르타군과 그들의 농노들, 1,100명의 보이오티아인이 7,000명의 페르시아군을 상대로 6일 동안 버텼다. 그러나 7일째 되는 밤 배신자에 의해 테미스토클레스의 해군이 도착하기 전에 전멸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들이 6일을 버틴 덕분에 아테네 시민들은 도시를 비우고 살라미스섬으로 안전하게 피난을 갈 수 있었다.

그리스, 살라미스에서 역사의 주도권을 잡다

이제 그리스 연합군의 지휘를 맡은 테미스토클레스는 후퇴하는 척하며 페르시아 함대를 살라미스 해협(아테네와 살라미스 섬 사이의 좁은 해협)으로 유인했다. 그리고 페르시아 해군이 해협 안으로 들어왔을 때 작고 빠른 그리스식 함선으로 크고 육중한 페르시아의 함선 옆구리를 들이받았다. 여기에 밤이 되면서 바람이 강한 서풍이 몰아치자 페르시아 함대의 4분의 3이 침몰하고 말았다. 주력부대를 거의 상실한 페르시아의 술탄 크세르크세스는 그해 겨울 본국으로 돌아갔다. 이후 30년 동안 크고 작은 전투가 이어졌으나 전면전은 사실상 종식되었다.

제1~3차 페르시아 전쟁은 역사적으로 동서양 문명의 첫 충돌이었다. 서양의 그리스 문명과 동양의 페르시아 문명의 전면전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살라미스 해전은 그리스 입장에서는 불리했던 전세를 단번에 역전시킨 쾌거였고, 페르시아 입장에서는 그리스의 핵심인 아테네를 손에 넣고도 결국 전쟁에서 퇴각하게 되는 통한의 패배였다. 사실상 페르시아 전쟁에서 승리한 그리스는 새로운 전성기를 맞았다. 특히 아테네는 페르시아의 재공격을 대비한다는 명목으로 기원전 478년에 ‘델로스 동맹’을 주도적으로 결성하고 동맹군 사령관으로 선출되면서 그리스 도시국가들의 맹주로 확고한 지위를 차지했다. 또한 국제적·사회적으로 안정되자 미술, 정치, 시, 연극, 철학, 법학, 논리학, 역사, 수학 등 여러 분야에서 50여 년 동안 전성기를 맞았다.